김동진론

    : 사진 스토리텔링이 향하는 곳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비평가)

 

다큐멘터리 사진은 주어진 상황에서 사진가가 정보 제공 혹은 스토리텔링의 목적으로 특정 장면을 선택하여 단면적 이미지로 만들어낸 선택의 결과다. 그 안에서 포토 저널리즘의 사진의 경우 한 장의 사진으로 정보를 뒷받침하는 비중이 크고, 스토리텔링 사진의 경우 여러 사진을 사진가의 구성에 따라 배열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이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특정한 사건 혹은 보이는 특정한 대상이 이미지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진가가 선택한 것이고, 그래서 그 이미지는 시공의 전후 맥락을 은닉하고 있다는 것은 같다. 김동진의 ‘또 다른 도시 I’과 ‘또 다른 도시 II’ 그리고 ‘해운대’는 정보 제공 혹은 기록으로서의 성격이 적고, 사진가가 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야기로 만들어 전하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사진가는 소위 정상이 비정상을 지배하는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소외, 외면, 박탈, 갈등 등 사회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비추고자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그저 다름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러한 배타성은 마치 전염병같이 사회에 퍼져 있다는 걸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진가 김동진은 그 인간세(人間世)의 몰(沒)인간성을 글이나 말이 아닌 이미지로 말하고자 하는데, 그 이미지는 그러한 사실을 정보로 제공함으로써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과 많이 혹은 전혀 다른, 환유적으로 공감될 수 있는 정도의 속성을 갖는 장면을 나열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이 주는 일차적 지시로는 별 관련이 없지만, 괴이하게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진을 보는 수용자가 어떤 기의를 자아낼 수 있다는 의도로 대상들을 연결하는 기법이다. 이러한 활용은 외형의 유사함이라는 차원에서 따른 것일 뿐, 팩트 그 자체로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철저히 문학적이고, 해석적인데, 그 안에서 사진가는 제시된 여러 기표가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몰인간성의 세계라는 의미화 속에서 연쇄적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창출하는 범주는 사진가가 작업 노트를 통해서 ‘다름의 배제’라는 몰인간성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분명하게 한정함으로써, 더 다양하고, 넓은 층위의 세계로 전이되는 것을 차단한다. 사진가 김동진은 ‘또 다른’ 도시를 비판을 넘은 전혀 다른 속성의 너머(beyond)로까지 확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사념이나 철학이 아닌 사회 다큐멘터리 안으로 국한하는 것이다.

 

사진가 김동진은 이러한 의도를 도시의 거리에서 만나는 여러 장면을 채집하여 작업한다. 도시에서 서로 다른 맥락의 장면들을 채집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한다. 도시가 비정하고 비열한 세계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렇다는 것을, 도시 이미지로 말한다. 도시라는 장소는 사진가들의 관심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그것은 도시의 역동성과 관련이 있다. 도시는 그 자체가 레디메이드 된 구성들을 일정하게 가지고 있는 곳이다. 격자로 나 있는 거리에서부터 수직으로 선 건물들과 공중의 면을 장식하는 곡선들과 원형 등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일차적으로는 어디를 가나 일정하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옷을 입고 말을 하고 일을 하는 모습들은 어디를 가나 얼추 비슷하다. 그러니 그러한 점과 선과 면을 이미지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진가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대개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도시의 거리 사진을 찍는 사진가는 사람을 본질적 관계론 안에서 만나거나, 그 안에서 살면서 그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남기지 않고, 그저 아케이드를 산책자로 거닐면서 그 안에 진열된 상품들과 존재론적으로 무관한 구경꾼이 카메라를 들어 스케치로 장면 하나, 하나를 잡아낼 뿐이다. 도시는 이렇듯 창작의 한계가 분명한데도 사진가들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는 도시가 비록 일정한 패턴에 있지만, 사람들이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메바 운동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산책자의 눈으로 볼 때, 이상하고 기묘하고 괴이하게 잡아낼 수 있는 장면들은 사건으로서 기록하거나 카메라로 특정 장면을 배치하여 미장센을 괴이하게 만들어내면 된다. 이른바 환유의 이미지를 원래의 맥락과 아무 관계 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김동진은 마음속 그림을 사건을 통해 기록하는 방식이 아닌 카메라의 표현 기술로 잡아내 이미지를 쌓는다. 어차피 사진이란 대상을 순간에 끊어내 정지시키는 것. 어떤 시간 안에 잡아내느냐가 문제이지, 전후의 맥락을 살리느냐의 문제는 문제가 될 수 없는 게 그 본질이다. 결정적 순간보다 더 짧은 찰나의 순간에 잡아내면 그 이미지는 완전한 탈역사의 이미지가 되는 수밖에 없다. 움직이면서 흔들리고, 화면 구성 또한, 소위 말하는 회화의 문법에서 벗어나 버리면, 그 이미지는 괴이해지는 수밖에 없다. 가게에 상품으로 걸려 있는 치마저고리를 자살한 처녀 귀신의 이미지로 불러내거나, 아름답게 꾸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목을 잘라버리고, 브라자만 입고 팬티는 입지 않은 여성 사진이 벽에 붙어 있는데, 그 앞에 두루마리 휴지가 놓여 있다. 이런 식으로 잡은 이미지는 본래의 존재론적 의미와 관계없이 사진가에 의해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비정상의 사회 단면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된다. 사진가로서 연륜이 쌓이면서 김동진은 괴이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고, 그 이미지들은 죽음, 파멸, 좌절, 가위눌림 등의 의미로 읽힌다. 각각의 사진은 소위 ‘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주목을 받고, 그 사진들이 전체 작업의 스토리를 좌우해 나간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책이나 벽면에 꽉꽉 채워서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관객이 주체적으로 감정을 일으키게 하지 못한다. 그 사이 사이에 공간이 있어야, 관객이 스스로 그 괴이한 모습을 음미하고 자기만의 느낌을 환유하고 은유로 넘어가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인데, 사진가가 그걸 꽉 채워서 관객에게 밀어 넣으면, 관객은 스스로 감정의 주체로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백과 연결의 미가 부족한 만큼 그 작품성도 부족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사진의 제시만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노래하는 것, 대중을 사로잡는 정치하는 것, 다 마찬가지다. 절제와 여백, 기다림, 공감, 가르치려 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 간의 관계다. 옳다지만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백을 주고 기다리는 것이다.

 

사진 작업은 크게 볼 때 재현과 제시의 두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전자는 한 장의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후자는 그 한 장의 사진들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 둘이 함께 작품성을 만든다. 작품이 전적으로 기록의 작업이 아니라면, 그 작품성은 예술 일반의 미학적 태도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미학적 태도는 작품을 절제와 수용의 미(美)를 매우 가치 있게 여긴다. 작품은 절제하여 보여줄 때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위에서 관객이 수용하여 공감하는 주체로 설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장 한 장은 물론이고, 그 한 장 한 장을 이어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개체로서도, 전체로서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직유보다는 환유, 환유에서 은유로 넘어가는 것이, 절제와 수용의 경계를 넓히고, 그것이 작품성과 이어진다. 그런데도 사진가들은 사진 한 장의 재현에만 너무나 많은 공을 들인다.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해석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단계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제시를 큐레이터나 사진집 편집자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경향들이 많다. 글이나 영화로 하는 스토리텔링은 분명한 플롯이 있고, 그 안에서 작가의 역량에 따라 여러 사건이 연결되면서 사람들과 충분한 교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사진으로 하는 스토리텔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진이 기본적으로 맥락이 소거되고, 상황이 은닉되는 본질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플롯을 일정하게 구성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매우 어렵다. 결국, 사진가에 따라 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고, 비슷한 느낌의 이미지로만 구성되는 것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해진다. 결국, 동어반복(tautology)의 문제가 발생한다. 플롯이 일정할 수가 없는 사진 작업의 제시에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동어반복인지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그 사진 작업이 속하는 장르에 따라, 사진가가 세운 의도와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사진가가 좀 더 고민하면, 어느 날 문득 머리가 깨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야말로 참, 현대 예술적이다. 현대 예술은 과거 종교나 이념이 갖는 의식으로서의 고립되고 닫힌 가치를 넘어서 관객이 자유롭게 수용하고 해석하여 자신만의 예술성을 향유 하게 한다는 점에서 소통하고 열린 가치를 창조한다. 현대의 다큐멘터리 사진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 아닐까?

 

관객의 스탠스에 서서 볼 때, 사진 행위란 다름 아닌 이미지의 연결이고, 그 연결 속에서 스스로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과학의 산물을 보고, 기억이나 꿈을 꿀 수 있고, 그 과학의 산물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노, 슬픔, 살의, 비난, 그리움, 사랑 등을 얼마든지 느끼는 것이다. 한 장 한 장의 여러 장면은 섞이면서 하나의 환유와 그 너머의 은유를 향하는 것일수록 좋은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도시 작업이 세 번째로 나올지, 더 나올지, 그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제시의 세계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텅 빈 충만’, 선(禪)에서 그 스승들이 추구하는 그 이치. 비우면 찬다는 그 괴이함. 그것을 깊이 새겨보는 일이 사진가 김동진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사진은 기계로 하지만, 사람의 마음으로 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시공이 비어 있을 때 일어나는 법이다.